이제 연애 놀이를 하기가 어렵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서는 그 놀이를 수행할 수가 없다. 대부분의 현실 남자와 연애를 하면 물론 유쾌한 까르르 있고 어쩜 이렇게 애틋한 사람이 있는가 벅찬 마음이 들기도 한다마는 그럼에도 특히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굴욕적인 순간이, 너무 역해서 견딜 수가 없는 순간이 자꾸 찾아온다.
확실히 예전보다 남자들에게서 거부감을 느끼는 일이 많아졌다. 대화하다가 턱턱 걸린다. 하다못해 연예인 취향이나 눈요깃감을 목적으로 영상물을 즐기는 취향(블록버스터만을 좋아한다고 해도 맥락마다 다를 텐데)에 비위가 상하기도 하고 근본적으로 가장 싫은 점은 무신경함, 무신경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당당함,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여자애들 성추행 하고 이런 선생님은 없었는데?”와 같은 천진한 말을 하는 인간들. 예전에는 내가 바로 그 산증인이라고 열과 성을 다해 말해줬겠지만 이제는 ‘대체 어떻게 살면 그렇게 주위 한번 돌아보지 않고 살아왔니 적어도 상상력이라도 가져 !’라는 생각이 들어 상대가 너무 한심해지고 그냥 말을 붙이기가 싫다.
뭐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임신과 군입대는 등가교환!’이라는전통적인 공격 태세로 임하는 것부터 자기 기준으로 착한 페미니즘과 나쁜 페미니즘을 재단한 다음 ‘나쁜 건 나쁘잖아 우리 모두 착하게 살면 좋을 텐데’ 운운하는 것까지 (나름 잘 보이려고 하는 말이었다는 점이 아찔할 따름임.) 모조리 괴롭다. 이렇게 한없이 다종다양한 고비가 겨우 연애에서 쏟아지다 보니 대화로 푸는 것도 참는 것도 피차간에 괴로운 일이다
물론 그게 누구든 소통을 계속 시도하면 혁신적으로 관계가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일이라면 해보기라도 하겠는데 놀고 먹고 쉬는 시간까지 굳이 싸우면서 에너지를 쓰기 힘들다. 먹고살기 위한 목적이 아닌 사람에게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을 텐데 굳이 연애라는 방식을 택해 투쟁적으로 보내야 할 이유가 있는가… ..
물론 고리타분한 엄마 아빠 놀이, 포기해야 한다. 역할 설정의 기반부터 잘못이었다. 버리는 게 옳다. 그런데 비겁하지만 억울하다. 아무리 나를 위한 정체성이 아니었지만 최소 20년동안 내 나름대로 발전시켜온 역할이었고 놀이 규칙이었다. 뿌리를 뽑고 고향을 떠나는 게 최선일까.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고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되기에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으니 그동안에 활용할 수 있는 연애의 방식을 갖고 싶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생각나는 노력 방법이 1. 남자가 아닌 여자에게서 섹슈얼한 매력을 발견하기 (물론 그럼에도 위험을 다 피할 수는 없겠지만;) 2. 연기자로서 역할극 하기 3. 연애 상대는 남자로 보지 않기.. 셋 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좋은 페미니스트 분이 한국 남자와 연애 놀이 하기 가이드를 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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