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 편집본

퇴사하고 뭐 했는지

지난 금요일은 퇴사일이었다. 시원섭섭하다고 써야 할 거 같지만 전 회사 때와 달리 전혀 섭섭하지 않다!

이 회사에서는 거의 무기력하게 지냈다. 몸이 편하긴 엄청 편했다. 처음으로 워라밸이라는 걸 누렸다. 하지만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이 나의 역량 향상을 전혀 요구하지 않았고 그게 나를 내내 불안 초조하게 했다. 그 와중 자기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고 그게 나 스스로에게도 일말의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했다. 어쩌면 남들에게 이야기할 만한 일을 한다는 게 나에게 중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이번 이직 결정을 내리며 하게 되었다.

가산디지털단지라는 근무 환경은 더 말 보탤 필요 없이 너무 싫었다. 아스팔트 천지에다 실용성으로만 이루어진 공장 같은 공간에서 모두가 좀비처럼 일하고 먹고 싸고 하는 그 삭막한 풍경이 너무 싫었다. (광화문에서의 직장을 알바로 친다면) 첫 번째 직장이었던 신문사에서 일했던 때도 이 단지의 분위기에 진저리가 났던 것 같다. 정이 전혀 안 가는 공간이다 참.

너무나도 익숙한 출근 풍경. 바이바이다! 마지막 날답게 비가 왔는데 팀장님은 내가 떠나서 하늘도 운다고 했다…ㅋㅋ

그래도 이곳에서 몇 가지 좋은 경험을 했다. 특히 팀과 함께한 AI 경진대회가 재밌었고 그 상금으로 간 워크숍이 즐거웠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출판계를 떠나 다른 직종으로 가는 교두보가 되어 주었다. 보고란 어떻게 하고 엑셀은 어떻게 쓰는지 회사원 스킬의 기본을 스스로 연마하게 해주었다. (이제야 회사원으로서 기본을 갖춘 것 같다.) 앞으로도 회사가 사업을 잘 영위하기를 바라지만 솔직히 구시대적인 인프라로 얼마나 오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퇴사하고 다음 날에는 전날 기념이랍시고 고속사망식을 많이 먹어서 더부룩한 채로 일어났다. 소화시킬 겸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갔다. 가볍게 공원을 찍고 오려고 했는데 그 공원에서 만난 서울 100K 참가자들을 따라 얼떨결에 북한산 둘레길 등산을 하게 되었다… (왜 나는 등산을 피하는데 등산이 날 쫓아오는 거 같지?)

북한산에서 바라보는 너무나도 쾌청한 가을 새벽빛 하늘~

다행히 도중에 불광역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발견해 그 일행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 아무튼 새벽 산책으로 과하긴 했지만 괜찮은 등산로를 알게 된 건 행운이었다. 혼자서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요 며칠 집 근처 산들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대부분 그럴듯한 입구를 갖고 있지 않다. 절대 입구가 아닐 것 같은 여상한 주택가에 갑자기 개구멍처럼 입구가 나타난다. 재밌는 부분이다.

어제 오후에는 독서모임 지정 책인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을 반쯤 읽다가 지쳐서 포기하고, 기대하고 있던 김애란 작가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었다. 크고 작은 거짓말을 품고 있는 세 명의 아이들을 둘러싼 섬세한 감정선, 평범하게 소외된 자들끼리 가질 수 있는 느슨한 연대의 가능성, 사소하게만 보이는 작디작은 무엇이 아이들에게 거대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걸 웅변하는 장치들에 감탄했지만 그 시절을 지나와서인지 마음에 와닿지가 않았다. 내가 너무 세상에 찌들었나 자문했을 정도였다. 얼마 전 본 <룩 백>에도 비슷한 거리감을 느끼긴 했는데 워낙 그림이 훌륭한 덕에 감동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섬세하기 그지없는 소년소녀의 감수성을 탐닉하는 작품을 경계하게 된다. 뭐랄까 “좋을 때지!” 하는 옛날 어르신이 된 것 같달까. 옛 추억밖에 할 말이 없는 응답하라 류의 퇴행을 미리 우려하게 된달까. 사실 <빅토리>도 그 젊음을 소비하는 기분이 들긴 했었다. 아무리 건전한 방식이라도 소비하는 건 소비하는 거였다… 오늘 본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20대 시절을 함께 보낸 가족 같은 친구를 만든 주인공이 부러웠고 소수자를 응원하는 연출에 감격했지만 마찬가지로 “좋을 때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싶지 않아 조금 뚱하게 보았다.

<대도시의 사랑법>을 보고 구파발역에서 따릉이를 타고 연신내역까지 갔다가 은평구립도서관을 찾아갔다. “정말 여기 맞아?” 하는 의심에 계속 지도앱을 확인했을 정도로 외진 곳에 있었다. 노출 콘크리트로 된 건물은 멋있었다. 누구 말대로 ‘요새’ 같았다.

새 직장에서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아보다가 거의 관계없을 두꺼운 책을 두 권 빌려서 옥상 정원에서 한 챕터 읽었다. 공간은 책 읽기 너무 좋았지만 바람에 머리가 날리는데 묶을 게 없어서 오래 읽지 못하고 일어섰다. 왔던 길로 다시 가기 싫어 지도앱으로 검색해 외진 산길을 택해 집으로 돌아왔다. ‘무장애 숲길 공사’라는 이름으로 산이 무자비하게 파괴되고 있는 현장을 지나가게 되었다. 스산하고 착잡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모험하는 거 같고 재밌었다.

이럴 때 보면 확실히 충동적인 탐험을 좋아하는 것 같다. 천성은 움직이기 싫어하는데 탐험을 좋아하다니 모순적이라 웃기다. (그래서 몰되를 할 수 있었나!) 돌아오는 골목 풍경은 재개발구역으로 옛날 어린 시절 돌아다니던 골목을 떠올리게 했다. 이곳도 곧 사라지겠지 싶어 아쉬움에 사진을 좀 찍어 두었다.

내일은 보통의 월요일인데 회사에 가지 않는다. 신기하다! 내일도 여섯 시쯤 일어나 가볍게 산책하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어야겠다. 그리고 엄격하게 저속노화식을 실천해야겠다. 채소가 너무 많아서 그러지 않으면 썩히게 될 것이다.

아무튼 회사 안 가니 일기도 길게 쓸 마음이 들고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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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고 뭐 했는지” 글의 댓글 2개

  1. 익명

    가속노화도 아니고 고속사망 너무 무서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 ㅋㅋㅋ 근데 어쩌면 저속사망이 더 무서운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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