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 편집본

부산행 여름 휴가 구구절절

너무 오랜만의 기록이다. 블로그를 조금 더 아껴줘야겠다.

얼마 전 또다시 충동적으로 부산행을 결정했다. 회사에서 점심 먹다가 문득 올해 여름엔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했음을 깨달았고 그러자마자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거세게 치솟아올라 바로 휴가 결재를 올리고 부산행 티켓을 예매했다. 급히 부산 친구를 섭외 완료한 후, 나머지 시간엔 뭐 할까 궁리하다 도저히 집에서는 안 읽히는 책들을 해운대 근처 숙소에서 ‘자발적 통조림’이 되어 해치우는 1박 2일 휴가를 테마로 잡았다.

계획을 세운 그날로 신 나서 통조림이 되어 읽을 책을 섬세하게 선별했다. 그리고 다섯 권의 두툼한 인문서를 책장에서 뽑아낼 수 있었다…

보편성의 기준 모색이라는 나름의… 테마가 있다…

이 계획은 당연히 수정되었다. 책 권수를 수정한 건 아니었다. ^^

휴가 계획을 세운 다음 날인가였다. 제주 워크숍 날짜를 확정하면서 제주에 간 김에 개인적으로 휴가를 붙여 본태박물관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제주 갈 때마다 이동이 애매해서 가지 못했던 곳이었다. 그런데 예약하려고 보니 마침 본태박물관의 입장권 중 부산 비엔날레 표를 제시하면 할인해주는 권종이 있는 게 아닌가. ‘전 주에 부산에 가는데 운명인가…?’ 해서 비엔날레가 여행 일정에 갑자기 끼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1박 2일 동안 모든 일정을 소화하기에는 부산이 너무 넓었다는 것이다. 부산은 광역시였다. 처음 계획대로 해운대 쪽에 숙소를 잡으면 비엔날레가 열리는 부산 현대미술관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책 다섯 권을 읽겠다는 계획은 그대로였다.)

2박 3일쯤 되면 모를까, 이 루트는 아니다… 싶었다. 급하게 부산의 다른 바다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 취향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다대포지만 도저히 그 근처의 적당한 숙소를 찾지 못하고 결국 송도에 머물기로 했다. 돌이켜보니 좋은 선택이었다.

부산에 꽤 많이 놀러갔다고 생각했지만 송도랑 그 근처 시장은 처음이었다. 이번에 국제시장과 깡통야시장을 가 봤는데 중국 관광객이 많았고 엄마 손 잡고 둘러보던 옛날 시장 생각도 나고 아무리 죽어가는 상권이라지만 흥겨웠다.

1일차 저녁. 친구가 감바스를 사주었다. 싹싹 설거지해서 먹었다.

얼떨결에 가게 된 부산 비엔날레도 예상보다 훨씬 즐기고 왔다. 가기 전에는 현대미술이고 비엔날레의 주제가 ‘어둠에서 보기’이다 보니 파괴 망각 포스트휴먼 등등 뭔가 무겁고 우울하고 학구적인 분위기일 거라고 상상했었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발랄하고 생명력 넘치고 희망의 빛을 찾으려는 젊은 몸짓으로 가득했다.

압도적이었던 송천 스님의 <관음과 마리아-진리는 내 곁을 떠난 적이 없다>. 왼쪽 마리아 그림은 비단에 전통안료를, 오른쪽은 한지 채색인데 이 앞에 서서 바라보면 은혜 받는 기분이 든다. 실제로 이 앞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머무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 외에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많았다.

아, <야행> 퍼포먼스에도 참여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앞뒤 사람의 기척만 느끼며 미로를 헤매는 형식의 참여형 퍼포먼스였다. 30분 정도 진행됐는데, 나중엔 참가자들에게 인간의 소리 아닌 다른 소리를 하나씩 만들라고 하고 서로가 서로를 어둠 속에서 그 소리로 인지하게 했다. 나는 호~호~ 하면서 다녔는데 작가의 의도대로 이상한 해방감이 들었다.

오랜만에 감각을 깨우는? 혹은 새로운 감각을 발굴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과연 책을 봤을까? 봤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열차 안에서 데이비드 흄의 <취미의 기준에 대하여 / 비극에 대하여 외>를 재미있게 읽었다. 비엔날레 보고 친구랑 밥 먹고 숙소에 돌아와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역사-끝에서 두번째 세계>를 꾸역꾸역 다 읽었다. 내용은 역사를 배웠던 사람으로서 흥미로웠는데 워낙 피곤했던 탓에 졸면서 새벽 4시까지 봤다.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에티엔 발리바르의 공저 <인종, 국민, 계급> 역시 읽었다. 이건 숙소 체크아웃 하고 영도로 들어가 서울로 가는 차 시간을 기다리면서 봤다. 솔직히 발리바르는 잘 이해가 안 가고 월러스틴은 뭐 예전에 읽은 깜냥이 있어선지 감탄하면서 끄덕이면서 밑줄 쳐 가면서 읽었다.

영도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카페였다.

<사람, 장소, 환대>는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읽었다. 사실 이건 예전에 읽은 적 있었는데 좋았던 느낌만 있고 내용이 잘 생각이 안 나서 한번 다시 읽어놔야겠다 싶어서 들고 온 책이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좋았다. 다만 다 읽고 인류애 가득 차서 트위터 들어갔다가 아주 끔찍하고 더러운 텔레그램 방에 대한 기사를 보고 롤러코스터를 타듯 인류애가 지옥 끝까지 떨어졌다. 간신히 휴가에서 키워 놓은 세계에 대한 희망, 보편성과 인간주의에 대한 가능성 등이 불같은 분노에 싹 밀려나고 길에서 만나는 모든 젊은 남자들을 노려보며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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