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추천 받은 만화책 <양아치의 스피치>를 보고 몇 가지 느끼는 바가 있었다. 보기 드물게 지식을 스토리에 잘 녹여낸 교양 만화였다는 점과, 나 역시 언젠가부터 생각을 나누기 위한 말하기가 아닌, 주로 리액션을 위한 말만 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자각이었다.
종종, 내 생각을 말하기가 쑥스럽고 장구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연극 <아트>를 본 후 추천해준 사람에게 연극이 좋았다고 말할 일이 있었다. 그러나 “진짜 재미있었죠?”라는 질문에 내가 낸 대답은 “정말 좋았어요. 배우들 연기가 대박…”이었다.

그보다 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재미있었지만 왠지 너무 젠체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잘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그 연극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개념을 물리적 현실에 적용하면서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지를 블랙 코미디로 풀어낸 점이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커가면서 변하는 친구 간의 우정 이야기, 그러니까 같은 감정을 느끼고 같은 유머 코드를 공유했던 시절의 관계성에서 독립을 시작하는 세르주와 그에 대한 마크의 반발을 다룬 우정 이야기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부로 인한 계급 차이가 취향과 정체성,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 재밌었다. 이 모든 감상을 회사에서 점심을 먹으며 풀어내기에는 용기(?)와 넉살이 부족했고, 그래서 ‘대박’이라고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경우는 그럴 법하다. 회사니까. 리액션용 말하기만 하는 이유 중 요즘 심각하게 느끼는 건 어휘 부족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 입으로 내뱉는 어휘의 부족이다. 머릿속 사전에 많은 단어를 갖고 있지 못해서가 아니라, 예전보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지 않아 상황에 걸맞은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그냥 학습된 리액션만 보이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이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 학습된 리액션의 개수를 많이 늘리는 것으로 해결해야 하나?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보통 대화를 하고 싶은 이유는 상대방과 생각을 나누고 싶어서지 단지 맞장구쳐주고 싶어서가 아니다. 노화려니 하고 실시간 대화를 포기하고 살아야 하나? (슬프다 ㅠㅠ)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생각이 없어서 리액션만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 좋지 않다. 일상에서 주어+동사+목적어로 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된다. 생각이 안 되면 당연히 말로도 안 나온다. 대부분의 사건을 흘러가는 상황으로 열 없이 스쳐 보내고 상대의 말에 적절히 반응하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덕분에 마음은 평화롭지만… 정말 이렇게 생각 없이 살아도 괜찮은 걸까? 석가모니는 쾌락과 고행 둘 모두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상태, 번뇌에서 벗어난 상태를 긍정적이라고 설파했는데 한 마리의 사회적 동물로서는 그래도 괜찮을지 잘 수긍이 안 된다. 게다가 생각을 없애는 버릇은, 사실은 상처 받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않기 위해 방어적 태도를 취하도록 스스로를 키운 결과일 수 있다는 의심이 든다.
잘 모르겠다. 모르겠다고 하는 버릇이 좋은지 안 좋은지도 모르겠다. (ㅋㅋㅋ) 모든 일에 의견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겠지. (예를 들어 하이브-민희진 사태처럼;) 하지만 가져야 할 의견도 가지지 않고 일상을 영위하는 게 아닌지, 그런 대화만 할 줄 알게 되어 결국 진지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다 없어지지 않을지, 덜컥 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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