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 편집본

나도 그런 환상이 없었다

미취학 아동 시절, 나와 동생이 가장 재밌게 했던 놀이의 장르는 어드벤처였다. 각자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지닌 인형들을 데리고 다양한 역할을 부여해 가며 창창한 판타지 모험담을 만들어냈다. 주인공과 설정은 늘 바뀌었다. 토순이와 노랭이를 주인공 삼아 엄마 찾아 삼만리를 하는 이야기부터 티노를 주인공 삼아 마왕에게 붙잡힌 미미를 구해주는 이야기까지 다종다양했다. 그러한 판타지 어드벤처의 세계는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동생만 남겨둔 채로 자연스럽게 닫히고 말았다.

티노와 토순이 노랭이. 내 친구들이었다.

더 나이가 들어서는 상상 놀이의 주인공이 현실의 나로 바뀌었다. 판타지 소설을 읽으며 언젠가 나도 그 세계로 불려 갈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가졌다. 언제 그렇게 될지 모르니 대비하는 차원에서 주문을 연습하고 무술 동작을 흉내 내 보기도 했다. 같은 시기 순정만화와 로맨스 소설과 팬픽을 읽으며 초월적인 어느 누군가에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뜨겁게 사랑받는 환상을 품었다. 그 모든 환상의 잔재를 부모님한테 발견당하고 스스로 수치스러워지는 일이 많아지면서 점점 그런 환상을 억누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 컴퓨터가 학교와 가정에 보급되고부터는 내가 동급생들보다 조금 더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데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침 빌 게이츠 위인전을 감명 깊게 읽은 덕에 한동안은 미래 천재 프로그래머가 되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중학교 담임 선생님도 어머니도 모두 너는 수학에 약하고 문과 과목들에 강하니 문과 고등학교로 진학해야 한다고, 게다가 현실적으로 여성 프로그래머는 너무 일하기 힘들다고 말렸다. 아쉬웠지만 납득했다. 착한 딸이었으니까. (이건 지금 생각하면 현실적으로도 참 통한의 결정이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나의 감수성을 알아봐 준 누군가에 의해 대단한 작가가 되는 환상을 가졌다. 실제로 당시에 어설프게 시를 써서 인터넷에 게재하곤 했었는데, 그걸 본 나름 유명한 한 출판사에서 작가 등록비 30만 원인가를 내면 시집에 수록해 주고 등단(?)을 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해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심 괜히 헛바람 들면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거절하게 시켰다. 나에게는 의심스러운 제안 같다고 하고. (다소 그런 감이 없진 않았다!) 역시 아쉬웠지만 납득했다. 착한 딸이었으니까.

으레 여자들은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진다고 한다. 실제로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결혼할 남녀 모두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부니까 웬만하면 신부님이 원하는 대로 하게 해야 한다.”는 말을 가스라이팅처럼 주입 받는다고 들었다. (대다수는 의사 결정 과정을 심플하게 만들고자 하는 결혼식 준비 실무자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말이겠지만…)

오늘 캐럴라인 냅의 에세이를 읽다 떠올렸다.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처럼, 나에게도 그런 환상은 없었다. 그런 환상을 가졌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으며, 그저 착한 딸이기에 빠르게 작별한 환상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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