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 편집본

동탁 장례식 헌사

그제 수업에서 낭독하기 위해 장례식에서 읽을 편지 형식의 헌사를 썼다. 다른 참가자들은 다른 사람을 위한 헌사를 썼는데 나만 동생 결혼식 때문에 지난주 수업을 빠져서 셀프 헌사를 써야 했다. ㅠㅠ 지지난주 숙제였던 40문장에 기반해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동탁)을 기리는 장례식 헌사였으니 엄밀히 말해 픽션이라 할 수 있지만 그 40문장 자체가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관한 내용이라 쓰면서 셀프 칭찬 같아 좀 민망했다. 낭독은 더더욱 민망했고……. 그래도 다시 보니 귀여운 면도 있고 나름 애틋하기도 해서 올려 둔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더 잘 알아주지 못했던 동탁에게

솔직히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것 같다. 너에게 가장 큰 행복이었던 여포가, 물론 장수하긴 했지만 결국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나서 네가 계속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거든.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토로하는 걸 민망해하는 너를 알기에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지만, 여포의 자리는 결코 다른 것으로 메워지지 않고 끝내 깊은 구덩이로 남겠구나 싶었지. 정말이지 끝이 예정된 생명체에 마음을 준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야. 하지만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었겠어?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과업들을 꾸역꾸역 마친 하루의 끝에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언제나 옆에 함께 누워 촉촉한 제 뱃살을 만지도록 허락하는 고양이와 살았다면, 나도 분명 너와 다르지 않았을 거야. 사랑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겠지.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려봤어. 이 자리에서조차 친근함이 장점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일단 너는 무언가에 화가 날 때면 아주 차가워져서 좀 다가가기 무서웠거든. 특히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인간들, 누군가의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못된 인간들 때문에 자주 화를 내곤 했지. 조금이라도 누군가를 기만하는 일을 싫어했고.

까다롭긴 했지만, 나는 근본적으로는 네가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해. 너는 세상은 그래도 수많은 선의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지. 한국에서 살면서 그런 믿음이라니 순진하다고 놀리긴 했지만 사실은 너의 그 낙천적인 면이 좋았어. 실제로 네게 행복을 주기란 참 쉬웠지. 햇볕을 쬐며 멍하니 있거나 홀로 좋아하는 음악에 잠기는 것만으로도 너는 쉽게 행복해지곤 했으니까. 가끔 사람들과 즐거운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기라도 하면 모두가 그 대화를 잊었을 때에도 홀로 기억하고 있을 만큼 작은 희망에 기뻐했어.

불현듯, 세상에 나온 적 없는 것처럼 아무 발자국도 남기고 싶지 않다던 너의 말이 떠오르는구나. 안타깝지만 마치 여포가 너에게 그러했듯 네가 주었던 행복은 우리에게 다시는 메울 수 없는 우묵한 구덩이로 남게 될 거야. 네가 있어 우리는 한층 서로에게 진심일 수 있었어. 고마워. 이제 편히 쉴 수 있길.


바탕이 된 40문장…

화가 나는 것

  1. 나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사람에게 화가 난다.
  2. 나는 친척들이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집 가라고 말할 때 화가 난다.
  3. 나는 고양이를 비롯해 동물을 학대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화가 난다.
  4. 나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자기 안위만을 위해 남을 기만하는 것을 알면 화가 난다.
  5. 나는 소수자의 존재를 지워버리고자 발언하는 동서양 정치인들에게 화가 난다.
  6. 나는 서울시장 후보 중에 나를 대표할 수 있는 후보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 화가 난다.
  7. 나는 누군가의 고민을 듣고 진심을 다해 답했지만 애초에 나의 답변이 중요하지 않았음을 알게 될 때 화가 난다.
  8. 나는 야생의 자연을 쾌적한 공원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토건 정책들에 화가 난다.
  9. 나는 부당한 모욕을 받아도 참아야 할 때 화가 난다.
  10. 나는 어리바리한 친구에게 사기친 교활한 회사 대표들에게 화가 난다.

행복하게 하는 것

  1. 나는 여포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 행복하다.
  2. 나는 하루의 끝에 자려고 누워 여포의 배를 만지고 있을 때 행복하다.
  3. 나는 휴일 아침 늑장 부리며 여포와 침대에서 뒹굴거릴 때 행복하다.
  4. 나는 내가 편집한 책이 잘 되면 행복하다.
  5. 나는 예상치 못한 호의를 선물받을 때 행복하다.
  6.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알아줄 때 행복하다.
  7. 나는 세상이 그래도 선의로 돌아가고 있다고 느낄 때 행복하다.
  8.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미래를 이야기할 때 행복하다.
  9. 나는 전율이 이는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행복하다.
  10. 나는 조용히 늘어져 한낮의 햇볕을 쬐고 있을 때 행복하다.

하기 싫은 것

  1. 나는 마스크를 쓰기가 싫다.
  2. 나는 아침에 일어나 회사 가기가 싫다.
  3. 나는 다이어트를 비롯해 운동하는 게 싫다.
  4. 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남에게 보여주기가 싫다.
  5. 나는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일들이 하기가 싫다.
  6. 나는 평가를 받게 되는 모든 일이 하기 싫다.
  7. 나는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를 하기 싫다.
  8. 나는 회사에서 팀원을 관리하는 팀장 일을 하기 싫다.
  9. 나는 가족의 의무라는 것들을 하기 싫다.
  10. 나는 의도가 아무리 좋더라도 거짓말을 하기 싫다.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것

  1. 나는 나와 남들의 안전을 위해 마스크를 써야 한다.
  2. 나는 남에게 기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회사에 다녀야 한다.
  3. 나는 병원에서 여생을 보낼 확률을 줄이기 위해 생활 운동을 해야 한다.
  4. 나는 친한 사람들에게 나의 괴로움을 토로할 수 있어야 한다.
  5. 나는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않으려면 반복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6. 나는 몸과 주변 환경을 청결하게 유지해야 한다.
  7. 나는 회사의 팀원들을 위해 적절한 관리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8. 나는 혼자 잘 살기 위해 노후를 어떻게 대비할지 고민해야 한다.
  9. 나는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받았던 만큼 가족 구성원으로서 필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10. 나는 싫은 사람과도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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