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목욕탕이 싫었다. 덥고 습하고 때를 미느라 힘들었다. 가장 싫었던 건 그 안의 분위기였다. 처음 만난 게 분명한 아줌마와 할머니들이 목욕탕에서는 가슴을 덜렁거리며 탕과 탕을 오가다가 단짝 친구가 되곤 했다. 그들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서로의 등을 밀어주고 별별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자식 이야기, 자식의 학교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 목욕탕에서는 심지어 엄마도 엄마 같지 않았다. 내가 아는 엄마는 그렇게 알몸을 드러낸 아줌마들과 어울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곳의 분위기가 엄마를 무장해제하는지 엄마는 자꾸 옆 사람과 시답잖은 말들을 나누며 즐거워했다. 나는 그 모든 거리 없음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목욕탕을 가야 하는 날이 오면 진저리내며 싫어했다.
내가 목욕탕을 내 돈 주고 혼자 가게 된 건 약 5년 전부터이니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햇수로 치면 오래 됐지만 집에서 나와 자취를 한지는 13년째이니 적어도 7년 동안은 목욕탕을 멀리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처음 목욕탕을 내 돈 주고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를 기억한다. 평범하게 피곤한 회사에서의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데 갑자기 목욕탕 간판이 눈에 띄었다. 그냥 그 순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는 인생의 꿉꿉함을 목욕탕이 마법처럼 날려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려고 하니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대중목욕탕은 여섯 시면 문을 닫는다. 회사원이 그런 동네 대중목욕탕을 가기 위해서는 휴가를 내거나 주말에 가는 수밖에 없다. 찜질방은 늦게까지 운영하지만 끌리지 않았다. 목욕이 목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놀기 위한 공간 같았고 혼자 가면 왠지 소외감을 느낄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건 단지 몇 개의 탕과 사우나 한둘로만 이루어진 단출한 대중목욕탕이었다.
아무튼 목욕탕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단 며칠도 기다릴 수 없었던 나는 다음 날 출근해서 반차를 쓰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입장료는 아마 5000원이었던 것 같다. 이 시간에 왜 젊은 여자가? 라는 의문이 담긴 듯한 표정으로 수건과 함께 습자지 같은 재질의 팔랑거리는 핑크색 표를 끊어준 할아버지는 손으로 여탕의 입구를 가리켰다. 이상한 꽃무늬 비닐이 드리워져 있는 발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속옷만 입고 라커룸 평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세네 명의 아줌마-할머니들이 일제히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어차피 숨을 곳도 없는 작은 공간이었다. 그들은 나에게서 흥미를 거두지 않는 눈치였으나 곧 다시 자기들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말을 시킬까봐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후다닥 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그 목욕탕은 정말 바라던 대로 소박했다. 시멘트가 다 드러난 천장 아래 샤워기 열댓 개, 냉탕 하나, 온탕 두 개, 열탕, 사우나, 구석에 있는 때 미는 비닐 침대가 전부였다. 사람도 많지 않았다. 한 두어 명이 냉탕에서 물을 끼얹고 있는 정도였다. 최대한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웅크리고 샤워를 마친 후 타일이 닳아빠진 온탕에 몸을 담궜다. 주위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뭔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평화로웠다.
그 후로 몇 번 이사를 했고 그때마다 집 근처의 대중목욕탕을 찾아 정기적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나름 엄청난 생활의 변화였다. 물론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에게 등을 맡기고 밀어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한 건 아니었다. (대중목욕탕의 메인스트림에는 영원히 녹아들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목욕탕만의 허물없는 분위기에서 목욕을 하고 있으면 마음이 녹는 듯 노곤노곤하게 편안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목욕탕에서 목욕하기는 ‘금빛 게으른 소 울음을 우는 곳’과 같은 내 나름의 향수였던 것이다.

문제는 지금 사는 집 근처에는 대중목욕탕이 없다는 것이다. 몇 달 전 하나 남아 있었던 목욕탕이 폐업한 후로 목욕탕에 가지 못했다. 멀리 있는 목욕탕을 갈 수도 있었지만 사실 목욕탕이라는 게 집에서 멀면 그 장점이 많이 바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면 목욕을 끝낸 후 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가는 그 나른한 해방감을 완전하게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없어도 사는 데는 지장 없지만 없어지면 대체할 수 없는 이런 향수 어린 공간들을 또 얼마나 잃어버리고 잃어버렸을까, 이런 감상에 젖다 보면 다소 늙어가는 기분이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