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 편집본

휴가의 시작

한 달 휴가를 얻었다. 퇴사하지 않는 대신 좀 오래 쉬어야겠다고 했더니 어서 그러라고 해서 냉큼 질렀다. 원래 계획은 퇴사하는 거였고 쉰다면 클래식 2권을 마무리짓고 쉬는 거였지만 그냥 다 인수인계 하고 휴가 내버렸다. 결과적으론 잘됐다 싶다. 새로 온 조직 구성원으로 인해 화병이 도질 타이밍이었던 것 같아서. 알아서 하라지. 라고 쿨하게 말해보지만 매일같이 끝내지 못한 2권에 대한 악몽을 꾸고 있다…

회사를 나오려고 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개였다. 하나는 모 저자의 영달에 기여하면 안되겠다는 윤리적인 이유였고 또 하나는 기왕지사 텍스트 기반의 미디어를 업으로 삼는다면 오랫동안 써먹을 수 있도록 동시대적인 방식을 배워 봐야지 하는 현실적인(?) 이유였다. 이렇게 결정적인 이유들이 있었음에도 퇴사를 하지 못한 건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이 두 가지를 해결할 수 있을 테니 계속 다녀 보라는 만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주장에 별 근거는 없었지만 믿고 싶어졌고 결국 당장 퇴사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그 결정을 되돌리고 싶어질 수 있으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후회할 수 있으니까 일단 휴가를 좀 오래 갖기로 한 것이다. (넉넉하게 잡플래닛 3개월권을 끊었다.)

이제 업무일 기준으로 겨우 이틀 휴가를 보낸 참이지만 도망칠 시간 외에도 휴가를 통해 얻을 수 있겠다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일단 일과의 거리다. 젖 떼기 같은 비유를 쓰고 싶지 않은데 아무튼 이렇게라도 한 번 놓으니 쓸데없는 애착이 많이 사라진 거 같다. (그전에 기운 차게 프로젝트를 휘어잡으려고 하시는 높은 새내기 분 덕분에 화들짝 놀라서 정이 떨어졌기도 했지만…)

일에서 멀어져서 좋은 점 중의 또 하나는 그동안의 일에서 얻은 경험을 정리할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동안은 너무 당장 내 일이라서 차마 제대로 평가해오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이 일을 하면서 굳이 살아야 한다면 무슨 일을 하고 살고 싶은지 그 기준이 조금이나마 분명해졌다. 그 기준을 정리하고 해온 일의 면면을 재맥락화하는 작업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무엇보다도 좋은 건 ‘얼른 자야 내일 일에 지장 없을 텐데 or 일만 하다 지금 자기 아까운데’ 사이에서 방황하며 쓸데없이 웹서핑, 인터넷 쇼핑, 티비 시청 등에 시간을 소모하다가 잠드는 짓을 안할 수 있다는 거다. 즉 스케줄이 없는 자연인(?)인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지금까지는 맥 환경을 정비하고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를 시작했으며 책을 다섯 권이나 읽었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고 여포를 그리기 시작했다… 다들 여행 다녀오라고 하는데 물론 좋은 기회라는 건 알지만 너무 돈이 많이 들고 그조차도 좋은 휴가를 보내야 한다는 의무처럼 느껴져서 일단 보류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있어서 휴가 기간 동안 이 반 오픈 블로그 일기를 부지런히, 가능하다면 하루에 하나씩 써보기로 했다. (특별히 카테고리도 만들었다.) 다시 없을 휴가인데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을 남겨 두고 싶기도 하고 그럴 확률은 높지 않지만 혹시 나중에라도 휴가 때 아무것도 못했다며 괜히 자책할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부지런히 써놓으면 좋을 것 같다. 약간은 막 글쓰는 데 익숙해져야지 하는 마음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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