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 편집본

받은 만큼 준다: 그 누구에게든

사는 동안 아무 노력 없이 받아온 게 많다. 이를테면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경제적인 환경 같은 것들이다. 부모님과 외할머니가 몇십 년 소처럼 일해서 일군 환경을, 태어났다는 이유로 당연하게 누려 왔다.

사실 물질적인 게 아니라도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들은 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들이다. 과거 인터넷을 모든 사람에게 열린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싸웠던 컴퓨터 프로그래머들 덕에 한반도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드넓은 인터넷 세계를 탐험하며 자랄 수 있었다. 사라져가는 고유어들을 붙들어서 굳이굳이 사전에 수록하고, 굳이굳이 라틴어성서를 민중 언어로 번역하고, 일평생 백과사전을 만들고 자기 돈으로 공공도서관을 짓는 등, 아무튼 과거의 이름 모를 누군가의 노력 덕택에 나는 책이라는 오래된 친구를 갖게 되었고 수많은 밤을 덜 외로워할 수 있었다. 과거 학생회관을 점거했던 학생 선배들이 있어 동아리방에서 편하게 놀았고 진보적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버텨온 덕에 더 나은 세상이 있다고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나는 과거 누군가의 노력 덕에 그나마의 자유를 누려 왔다. (아마도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들은 다 자유와 관련되어 있다.) 그나마 돈에 덜 연연하도록, 그나마 성별 역할분담에 저항하도록, 그나마 말하고 싶은 걸 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런데 사람은 죽는다. 또 누가 죽었다. 분명히 갚을 게 있는데 죽었고 아무튼 갚아야 한다는 미미한 부채감만 남았다. 특히 요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 내가 받아온 모든 것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여러 가지 이유에서 엉뚱한 사람에게 갚게 될 수도 있을 거라고. 물론 괜한 비극에 사로잡히지 말고 이왕이면 준 사람에게 갚는 게 베스트겠지만. (나쁜 거라면 더 그렇다. 괜히 나중에 만만한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고약한 노인이 되지 않도록 복수는 당사자가 죽기 전에 빠르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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