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개연성도 없이 불쑥 꺼져버리는 구덩이 같은 사람들이 있다. 자기의 괴리감을 설명할 방법도 해결할 방법도 모르겠어서 그냥 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한낮에도 생생하게 어두운 맨홀 같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나는 늘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모르겠고 한심하게 멀거니 서 있게 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희미한 죄책감이 나를 하하호호 연극처럼 웃는 사람들에게서, 하여간 과거 역겨운 일들은 까맣게 잊은 얼굴로 어른스러운 교류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서 완전히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있게 만든다. 아무튼 아래 소설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을 발췌해둔다.
엄마와 누나는 그 병신 같은 행사에 가서 세뇌를 당하고 온 게 분명했다. 그러고는 집에 와서 그 사람에 대한 기억들을 완전히 재구성할 계획이었다. 내가 없는 사이 이 침대 위로 기어올라 서로 손을 붙들고 그런 날조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칼자국이 선명한 장롱은 순간의 실수로, 엄마를 때린 건 엄마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누나와 나를 학대한 건 그 사람도 알고 보면 어려서 비슷한 짓을 당했던 불쌍한 사람이어서라며 그 악인을 마침내는 우리 아버지로 날조할, 그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계획에 나는 훼방꾼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그 사람의 폭행과 폭언을 생생하게 일깨웠으니까.
-p.146
나는 편안해지고 싶었다. 엄마와 누나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집안을 그렇게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내가 아는 가장 불쌍한 여자들이었다. 둘을 기쁘고 즐겁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내 모든 기억을 지워야 했다. (..)
그렇지만 나에겐 맨홀이 있었다. 누나와 나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우리가 경험한 모든 폭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 뚜껑을 닫고 이 속에서 잠이 들면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되는 건 아닐까, 우리 둘의 죽음이 그 사람에게 가장 큰 복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누나와 조용히 소곤거렸던 기억들. 그날들은 흐르지 않는 물처럼 맨홀 속에 그대로 고여 있었다. 악취가 났다.
– p.163
내가 유일하게 긴장을 풀 수 있는 곳은 고물상뿐이었다. (..)
어떤 할머니는 고물로서 전혀 가치가 없는 이상한 모양의 장식품을 가지고 와서 무조건 저울에 얹으려고 했다. 아저씨는 그런 일들로 하루에도 몇 번씩 힘없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실랑이를 벌였다. 단돈 몇백 원을 두고 다투는 아주 치졸한 싸움이었지만 그 모습은 매번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할머니들이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열심히,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어쩐지 미안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은 나를 귀여워했고 교복을 입은 어린 내가 고물상 같은 곳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것을 아까워했다. 정작 나에겐 별로 아깝지도 않은 인생인데 말이다.
– p.185
누나는 면회를 와서 어떻게 해서든 내 형량을 낮춰 줄 테니 너무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누나가 누나답지 않게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도망갈 수 있었던 기회는 그 밤 누나의 방 문을 두드리기 전에 발길을 돌려 창문 아래로 돌진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왜 그 쉬운 일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지 몇 번이나 생각했고 생각할 때마다 매번 후회했다. 그렇게 했다면 기진이들과 희주가 이 같은 고통을 겪을 필요도 없었고, 훗날 범죄가 밝혀진다 해도 내 가슴에 살인범 외에 배신자라는 딱지는 붙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붙잡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그 힘센 손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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