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다원주의적 접근법이 지나치게 오만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떤 세계관이든 (그 깊이와 절실함이 얼마나 되건) 그 세계관의 주민들에게만은 소중할 것이다. 세계관은 삶의 거의 모든 일을 설명하는 가치 믿음 체계니까. 그래서 세계관끼리 부딪칠 경우 기본적으로 대화가 잘 안 된다. 기적적인 통역이 없고서야 자기 세계관의 언어로 다른 세계관을 이해하긴 불가능하다. 결국 불가능하고 그냥 법대로 하자~ 이런 식의 기계적인 상대주의적 접근법이 나오게 되는 이유일 거다.
그런데 다원주의적 접근법은 또 다르다.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어떤 사람들은 다양한 세계관들을 마치 곱게 한 판에 담아 놓은 달걀들처럼 대한다. 그리고 달걀은 다 달걀로서 가치가 있다!는 일견 관대할 법한 인정을 베풀어준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세계를 평평하게 만들어놓고 자신은 높은 곳에서 조망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반영된 결과다. 결국 자기도 의도치 않게(?) 적극적인 반정치로 나아가게 되기 마련이다.
세계관의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당장 로리 야동 애호가들, 대치동 강남의 슬픈 귀족 자제 집단, 광신 애국자들, 컬트적 군사집단, 몇몇 무능력한 꼰대 연대… 다 나름 역사도 있고 존재 이유도 있고 내적 논리도 발전시켜 온 세계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런 세계관들을 다원주의적 시각에서 무작위하게 펼쳐놓아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세계관은 반드시 어떤 세계관을 타파해야 사는 것도 있다. 내 안에서도 늘 상반된 세계관들이 싸우고 있는데… 주로 일에서 그렇다.
아무튼 다원주의적 접근법이 상대주의 전략보다 훨씬 기만적이라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다원주의가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란 식으로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서 내거는 간판이라는 의혹을 접을 수가 없다. 타인 혹은 자신의 여러 모순과 직면하기 싫어 만들어낸 아주 배타적인 세계관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세계관이라고 하지만 실제 세계관은 각각 명확히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다. 가부장제라는 세계관과 군사주의, 가족주의 세계관 등은 서로가 서로를 낳고 일부분을 공유한다. 어떤 세계관도, 한낱 문화도, 가장자리는 지저분하다. 그 모든 것들을 다원주의 판에 가지런히 모아 놓는다고 홀로 소요에서 빗겨나 존재할 수 없다.
크게 보면 다원주의적 접근법이 정치를 실종시킨다고 생각한다. 정치라고 할 수 있을까? 더 강한 이유가 있고 더 옳으며 궁극적으로는 구성원에게 다 조금씩 도움이 될 수 있는 세계관을 찾아내고 확장해가는 일, 외부에서 공격하더라도 충분히 자긍심을 느낄 만한 세계관을 탄탄히 지어내는 일, 그런 적극적인 행위는 정치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나. 물론 현재 기성정치는 유력 이익집단만의 이해관계 조정을 위한 기구가 되었기 때문에 불가능에 이른 것 같다. 아마 분명 사상과 사회운동, 미디어와 교육 등에서 이뤄지는 정치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소박(?)하게 평범한(?)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고 싶다. 어떤 일이든 가능한 남에게 떠넘기고, 내 불행만 중요한 것처럼 불행배틀을 하고, 구성원에 대한 아무 책임도 의무도 없이, 자기안위와 자기마음 다스리는 힐링 사업만이 성역의 자리에 올라 있는 소비자 제국의 식민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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