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 편집본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리처드 세넷

비록 1998년에 나온 책이라지만, 요새 읽은 수많은 글들을 제치고 내가 처한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게 해 주는 책이었다. 인상적인 몇 구절만 발췌해본다.

애덤 스미스의 저서 <도덕 감정론>에서 그는 일찌감치 동병 상련과 상호 공감의 미덕을 주장한 바 있다. 그는 동정심이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스트레스를 이해하게 될 때 분출하는 자발적인 도덕적 감정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분업과 일상(routine)은 이 자발적인 동정심의 분출을 무디게 하고 억압한다. 확실히 스미스는 분업과 시장의 성장을 사회의 물질적 진보와 동일시했지만 도덕적 진보와는 동일시하지 않았다. -p.48

근무 시간 자유 선택제는 새로운 여성 인력이 직업 세계로 몰려들면서 생겨났다. 부르주아 계층의 여성들보다는 주로 엔리코의 아내 플라비아와 같은 가난한 여성들이 일을 했다. – p.77

자신의 과거와 단절하는 능력과 분열을 받아들이는 자신감, 이것이 다보스의 신자유주의에 진짜 정통한 인물들에게서 나타난 두 가지의 인간성의 특성이다. 물론 그것들은 자발성을 고무시키는 특징이긴 하지만, 그러한 자발성이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반드시 훌륭한 것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자발성을 고무시키는 그러한 인간성은 유연한 체제 내의 하위층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자기 파괴적인 원인이 될 수도 있다.  – p.85

사회학자 로널드 버트는 현대 사회의 지위 이동에 대한 권위 있는 분석을 내린다. 그의 저서 <구조적 구멍들>은 느슨한 체제에서 변화하는 지위들의 특성을 보여준다. 즉 커져가는 틈새, 우회로, 또는 네트워크 내 사람들 사이의 중간 매개가 많아질수록, 개인의 지위 이동은 더욱 쉬워진다. 네트워크 내의 불확실성이 이동의 가능성을 부추키고 개인은 다른 사람이 예견치 못한 기회들을 이용할 수 있으며, 중앙 권력으로부터 지배력 약화를 촉진할 수 있다. 조직체의 구멍이란 곧 기회의 장으로, 전통적인 관료주의적 피라미드에서 승진을 위해 분명하게 규정된 좁은 틈새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 네트워크의 불연속성은 개인의 의식에서 불안정성을 가져온다. 또 그들은 이동 중에 길을 잃기 쉽다. 유연한 자본주의에서 불확실성이라는 구조적 구멍들 쪽으로 이동할 때 방향을 잡지 못하는 이유는 ‘애매 모호한 횡적 이동’, ‘뒤늦게 후회하는 손해’, ‘예측할 수 없는 수입의 변화’ – p.120

출발을 결정한 것이 이미 성취다. 변화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모험 감행에 관한 많은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현재 상태에서의 이탈, 즉 변화를 처음 결심할 때 사기가 고조된다고 한다. (..) 로즈는 늘 다시 시작하고 매일의 모험 속에 자신을 맡겨야 했다.  줄곧 알 수 없는 미래를 계산하며 초조해하다가 전혀 생소한 세계로 내몰린 것이다.
(..) 하지만 자리를 옮기고 나면 직책이나 임금 면에서 이득이  있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애매 모호한 횡적 이동이나 뒤늦게 후회하는 손해, 예측할 수 없는 수입의 변화 등의 상황에 직면한다. 그 결과, 사회적 적응도 과거의 계급 체계에서보다 더 어려워진다. -p.124

현대적 형태의 팀워크는 여러 면에서 막스 베버가 인식한 노동 윤리에 역행하고 있다. 개인이 아닌 그룹의 윤리인 팀워크는 개별 구성원의 가치보다는 팀 구성원들의 상호 반응을 강조한다. 팀에 배정되는 시간은 유연하며, 대체로 참을성과 기다림이 특징인 장기적인 예측보다는 단기적인 특정 업무에 맞춰져 있다. 그러나 팀워크는 현대 작업장을 에워싸면서 품위가 떨어지는 한 차원 낮은 수준으로 우리를 이끈다. 실제로 팀워크는 비극의 영역을 벗어나서 인간 관계를 일종의 광대극으로 취급한다. -p.153

그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은 변화에 수동적, 맹목적으로 고통당하기보다는, 리프먼이 말한 것처럼 ‘정복’하려는 정신과 일치한다. 확실히 그들이 취한 행동은 서로의 실패담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제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각자의 실패를 털어놓음으로써 이른바 실패에 관한 터부를 깨고 표면으로 드러냈다.  -p.190

이렇듯 그들의 이야기는 자기 치유적인 시도였다. 일반적인 이야기는 그 구조를 통해서 치유 작용을 하지, 결코 조언을 통해 하지는 않는다. (..) 좋은 이야기라면 ‘나쁘게’ 보일 수 있는 현실도 인식하고 탐사한다. 연극을 보는 관객이나 소설을 읽는 독자는 사람과 사건이 하나의 시간 패턴에 맞춰 체험하는 데서 특별한 위안을 경험한다. 이야기의 ‘모럴’은 조언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에 들어있다. – p.197

우리는 계속 만나야 한다! (술도 마시고…) 그리고 갑자기 감동받은 부분.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점에서 자아에 대한 충실이 하나의 사회적 차원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개념이다. 자신의 가치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의지할 수 없는가에 따라 인식된다는 주장은 단순하지만, 내가 나 자신을 잘 모르고 또 나 자신의 정체성 의식이 흩어지고 혼란스럽더라도 나는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부분은 복합적이다. 이것은 레비나스에게는 전혀 추상적이지 않다. 2차 세계대전 중에, 그는 수천 명의 프랑스 국적 유대인 동료들이 나치와 비시 정부의 박해에 대항해 서로 의지하면서 투쟁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 이전에 그들 대부분은 유대인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그렇게 강하게 인식하지 않았다.
책임감과 인간성의 자아-유지에 관한 레비나스의 생각은 다시 철학자 폴 리쾨르에 의해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누군가가 나에게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 나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된다.

아무리 어떤 사람의 인생이 엉터리 같다 해도, 그 사람의 말에 대해서는 기대를 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리쾨르는 우리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을 목격한 자가 있다고 계속 상상함으로써, 더구나 이 목격자는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우리에게 기대하려는 누군가라고 상상함으로써, 이러한 표준을 지킬 수 있음을 논증한다. 남다른 사람의 기대를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느껴야 한다. 또 우리가 스스로를 필요하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해야만 한다.  -p.212

“누가 나를 필요로 하겠는가?” 라는 질문은 현대 자본주의에서 급진적인 도전으로 고통받는 인간성에 대한 질문이다. 이 체제는 무관심을 확산시키고 있다. (..) 자본주의는 늘 무관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똑같은 식은 아니었다. 과거 계급에 기초한 자본주의에서의 무관심은 물질적인 색채가  강했다. 반면 유연한 자본주의에서 확산되는 무관심은 더 개인적이다. 왜냐하면 체계 자체가 덜 선명하고 형식의 측면에서도 이해하기 다소 힘들기 때문이다. (..) 역사는 있되, 어려움을 공유한 이야기는 없고 함께 한 운명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성은 점차 파괴되어간다. “누가 날 필요로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즉각적으로 정답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pp.21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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