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돼지 살을 튀긴 돈까스를 먹었다. 돈까스집에 앉아 피곤에 찌든 아주머니의 양배추 써는 소리가 점점 느려지는 걸 우두커니 듣다 문득 나라는 인간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이 필요한지 생각했다. 오늘 아침은 스타벅스에서 바닐라 라떼를 마시며 시작했다. 그제는 하루종일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석유를 흘렸고 말보로를 한 대 얻어 반만 피고 버렸다. 어제 넷플릭스에서 대부 2를, 푹에서 김과장 두 편을 시청했다. 회사 슬리퍼는 1+1로 이랜드 계열 슈펜 매장에서, 뉴발란스 운동화는 병행수입으로 구매했다. 부모님은 아직도 자식을 위해 돈을 벌고 있다.
내가 떳떳하게 살기 위해 답해야 하는 문제는 이것이다: 나는 이 모든 착취를 누릴 만큼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
나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자선단체에 기부를 하고,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풂으로써 간편하게 문제를 돌파하고자 하는 마음을 알고 있다. 나도 그런 욕구에서 자유롭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건 결국 받는 사람의 이미지를 상정하고 그 보답을 바라게 된다는 점에서 크든 작든 또다른 착취로 이르게 된다. 은연중에라도 베풀 만한 사람을 골라 베풀고, 베풂을 받은 사람들이 당연히 감사하다고 느끼기를 바라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사기라고, 배신감을 느끼고.
아버지,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예수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위해 신에게 빌어주었다. 하지만 나에겐 대신 용서를 구해 줄 신의 아들도, 직접 용서를 구할 신도 없다. 선하게 살기 위해서는, 아니 지옥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의 안에서 찾아야 한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니는 이유가 가장 크지만 회사 일도 마찬가지다. 일 자체를 저자에게 칭찬받기 위해, 사장에게 인정받기 위해, 동료에게 사랑받기 위해 하는 게 아니어야 한다. 더욱이 내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할 필요가 있는 일이니까 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의 사회적 의미를 알려 해야 하고 그래서 나의 일이 곧 나의 존재 가치와 연결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적어도 일은 그래야 한다. 아니 일만이라도!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그게 나의 얼마 안 되는 (아주 제한적이지만) 선택 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선택할 수 있다는 건 권력이다. 그 권력은 사회적인 관계에서 나오며 그래서 가진 만큼 책임이 생긴다. 그러니 일이라도, 사회와 생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는 그 외에도 이미 수많은 착취 관계에 기반해 살고 있는데 도무지 그 관계를 그만둘 수 없음을 깊이, 아주 깊이 용인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하는 일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그나마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인가? 아직까지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계속 그 믿음이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며 아무튼간에 좀 더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음, 불길하게 왜 이렇게 미래 지향적으로 끝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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