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 편집본

가야 할 이유가 있는 곳

나에게도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을까? 누가 얼마 전에 물어봤을 때는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ㅎㅎㅎ 있다. 당장 떠오르는 건 몇몇 이질적인 세계를 목도하고 싶다는 소망이다.

하지만 이제 관광이라면 별로 가고 싶지 않다. 관광은 그러니까 일상을 살다가 힘이 남아돌아서 하는 것이다. 나는 따로 여가라는 공간을 마련할 수 있을 정도로 생의 멀티플레이가 가능한 사람이 아니다. 삶의 타임라인을 공적인 삶 > 여가의 삶 > 자기계발의 삶… 이런 식으로 구획과 단계를 구분해 여러 개를 운용할 수 있는 인간이 못 된다. 내 기준에서 여행이랄까, 아무튼 익숙하지 않은 장소를 맘먹고 경험하러 간다는 행위는 매우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일이다. 도저히 여가를 즐긴다고 할만한 게 아니다.

또한 그런 나에게 단지 일상을 벗어난다는 의미에서의 관광 여행은 휴식도 뭣도 안 되는 무의미한 자원 낭비로밖에 안 느껴진다. 내 자원 뿐만이 아니라 지구 전체의 자원도 낭비되는… 그래도 굳이 자원을 소비하며 가고 싶은 곳들이 몇 군데 있다. 이걸 여행가고 싶다는 욕구로 해석해도 될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게 실제라는 걸 알고 싶은 마음이다.

  1. 예루살렘: 책을 만들며 예루살렘에 대한 정보를 과하게 습득하게 되었다. 제대로 목격하지도 않고 잔인한 역사로 가득한 이 장소에 대해 아는 척 책을 만들어버리고 있는 게 너무 마음에 걸린다. 언젠가 두 눈으로 직접 담고 싶다.
  2. 태즈메이니아: 역시 책을 만들다 이곳에 관한 정보를 과하게 습득하게 되었다. 일단 서유럽 깡패들의 ‘탐험’으로 인해 멸종한 태즈메이니아 애버리진들의 비극을 추모하고 싶고, 그와 함께 멸종해버린 동물 종을 추모하고 싶다. 추모하고 싶은데 어떤 개인적 연고도 없는 상태에서 텍스트와 사진만 보고 추모한다는 게 좀 우습게 느껴져서 가보고 싶은 것 같다. 게다가 이곳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자연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3. 팽목항: 위와 비슷한 이유다. 도저히 안 갈 수가 없다.
  4. 베트남의 호치민 시: 이 시대 한국인으로 태어나버렸기 때문에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에 참회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꼭 그걸 베트남에 가서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비롯한 사람들을 실감할 수 있다면 내 윗세대가 저지른 죄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을까 싶어서다. 게다가 조선족 다음으로 이렇게 많은 베트남인 여성을 마주치고 있는데, 그들의 고향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있다는 것도 좀 이상하다. 직접 가서 보고 싶다. 왠지 나와 잘 맞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도 한다. 사실 가고 싶은 이유에는 영화 연인이 워낙 내 20대의 강력한 로망이기도 해서 그 영향도 꽤 있을 것이다.

아마 더 있을 텐데 당장 생각나는 곳은 이 정도뿐이다. 자잘하게는 외국에 나간 친구들이 사는 동네, 이런 곳도 있지만…

그런데 국내야 뭐 맘만 먹으면 갈 수 있겠지만 외국으로 떠날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여포를 맡기는 것도 일이고. 떠날 수 있는 시점을 예상해보면 퇴사 때, 여포가 명을 다했을 때,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결혼 등이 있겠구나.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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