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 편집본

상처라고 다 같은 상처인가

요 근래 트위터에서 여성들의 성폭력 경험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사과문이랍시고 나오는 게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 물결~”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고 그 언어가 근본부터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생각했다. 도대체 그분들은 왜 남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데 이유를 생각해 보려고 하니 말문이 막힌다. “내가 대우 받고 싶은 대로 행하라”는 그 오래된 격률과 같은 논리에서 나온 이야기인가?

상처라는 말은 의도치 않게 논의를 개인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해가 없으려면 반드시 맥락과 함께 이야기되어야 그 본질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데, 단순히 “상처 주는 건 나빠, 난 나쁜 사람이지… (멜랑콜리)” 이런 식으로 빠르게 인정하고 우울에 빠지는 방식은 문제를 호도하는 결과를 낳게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나 이번 폭로들에 대처하는 사람들에게서 “너도 상처 많이 받았겠지만 이후의 너의 폭로를 통해 나도 상처를 많이 받았어. 우리 그만하자…”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걸 많이 보았다.

상처라니, 성폭력은 상처의 문제 이전에 그냥 범죄다. 성폭력한 사람은 ‘상처를 준 사람’ 이전에 문명을 이루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어긴 ‘범죄자’다. 성폭력이 왜 나쁜지에 대해서까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특히나 미성년자와의 성관계를 강제한다는 게 왜 나쁜 일인지 설득해야 한다면 그냥 인류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을 수도 있다.

그러고보니 나도 미성년자일 때 과외 선생으로 만난 사람이랑 연애 비스무리한 걸 한 적이 있다. 벌써 아이 2명인 아빠가 되었다던데 잘 사는지… 암튼 사귀자고 내가 졸랐고 그 사람은 그래 보자고 하고 그 즉시 과외를 그만뒀다. 왜 자주 보게 그냥 계속 과외 하지, 라고 했지만 그 사람은 과외 학생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걸 즐기는 사람이 되기 싫다고 했다. 그때는 그 말이 잘 이해가 안 갔다. (지금은 아주 잘 이해한다.)

우리는 끝까지 손만 붙잡은 사이였다. 나는 당시에는 거기에 불만이 있었다. 나를 애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미성년자라고 사회가 지정한 건 다 이유가 있다고 했다. 너는 지금 이 관계로 인해 네가 질 책임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고 나중에 대학 가면 생각이 많이 바뀔 거라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돌이켜보면 그 지나치게 상식적인 사람 덕분에 나는 트라우마를 갖지 않은 채 당시의 연애사를 적당한 추억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던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런 경험이 있었던 나는 미성년자와의 섹스를 그렇게 당당하게 아니, 사랑했는데 뭐? 이렇게 말하는 데 큰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 놀랐다. 너무 래디컬한 거 아냐?;;; 그럼 법적으로 미성년의 나이 기준을 낮추고 당연히 선거 연령도 낮추고 그런 청소년 운동의 맥락에도 동의하는 건가? 분명 거기까지 생각 안 하지 않았겠지.

아무튼 상처라는 말로, 사랑이라는 말로 뻔히 존재하는 불평등한 권력관계의 불건전성을 덮으려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상처받아야 마땅한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맥락에서는 한없이 가벼운 ‘상처’도 있고 범죄가 될 수 있는 ‘사랑’도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상처고 사랑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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