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 편집본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아마도 인생에는 치트키가 거의 없다. 성공이나 사랑, 행운 같은 것들도 포장을 뜯어보면 속성은 그냥 랜덤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또한 신비한 힘이나 마법도 없다. 토이스토리 참 좋아하는데 슬프지만 인형은 인형일 뿐이고 동물은 사람 말을 할 수 없다. 소설이나 게임과는 다르게 삶은 재미없기 짝이 없으며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구질구질한 진창이다.

나는 이 무뚝뚝한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적어도 대학 때까지는 외면했었다. 대학을 들어오기 위해 친 수능이란 관문은 드물게도 치트키 같은 요령이랄까 무튼 손쉬운 방법이 통했다. (정말이지 적어도 내 세대의 수능은 순발력 있고 잔머리 잘 굴리고 칭찬받기 좋아하는 애들이 잘 보는 시험이었다.) 

뭐가 됐든 시험 점수를 높게 받으면 만사 오케이인 수험의 세계에서 살며 늘 오지선다를 만들고 유일한 답을 선택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어디서부터 문제인지도 모르고 정해진 답도 없는 삶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문제에서 도망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하거나 아니면 얼른 돌파 가능한 쉬운 길만 가거나 그랬다. 가족과의 갈등부터 취업까지 거의 대부분의 문제를.

하지만 이제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 문제 상황에서 내 무책임으로 해결하지 않은 게 후에 나에게 돌아오는 것뿐만 아니라 그만큼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고 나아가 세상에 민폐가 된다는 걸 어느덧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동안 내가 어떤 사람들에게 직접적이 아니라도 간접적으로나마 고통을 주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내 인생이 무책임하게 즐거웠던 많은 순간에 누군가가 나 대신 고민하고 있었고 내가 쓸 감정적 물질적 자원을 마련해왔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갖고 있던 은근한 자신감과 자존감은 얼마나 허황된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었을까. 반성하는 마음으로 돌이켜보면 지금 내가 무책임한 사람에게 유난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아직 그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내가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적어도 그랬던 내가 너무나도 부끄럽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튼 정말이지 삶은 참 재미가 없다. 태어나버렸다는 이유로 묵묵히 떠안아야 할 숙제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 숙제들은 심지어 하나만 찍으면 되는 오지선다 문제도 아니다. 집요하게 스스로를 밀어붙여서야 더디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문제들이다. 너무하지 않는가. 단지 태어났다는 죄로 왜 이 모든 걸.

사실 아직도 모든 얼키고설킨 어려운 삶을 명쾌히 바꿔줄 수 있는 마술지팡이가 뿅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아니 바꿔주지 못하더라도 내 순간의 선택들에 대한 책임에서 좀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다. 이를테면 만약 인생 빨리감기가 된다면 얼른 결말을 보고 시작했으면 좋겠다. 긴장하고 살고 싶지가 않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되고 그런 마법같은 일은 안 일어난다면 이 모든 짐을 외면할 합당한 핑계라도 주어지면 좋겠다. 사실 합당하지 않아도 그냥 외면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세계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솔직히 내세라도 믿으면 좀 편해질 수 있을까 상상한다. 이 세상의 것들에 덜 진지해지면 덜 스트레스 받지 않을까.

하지만 평생 마약에 취해 있지 않는 이상 이제 양심상 그럴 수가 없다. 죽을 만한 거창한 이유도, 사실 죽을 용기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간신히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 삶에 닥쳐오는 숙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일일 것이다. 물론 책임질 꺼리나 늘리지 말고 지금까지 내온 길대로 살아가는 게 최선이지 싶다. 이미 많은 선택을 해 왔고 그에 따른 숙제들이 산적해 있으니까. 이렇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선택들을 해 가며 피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점에서 다들 운명 타령을 하는가보다.

아마도 나는 그 운명에 허덕이지 않고 운명과 발 맞춰 잘 나아가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예기치 않게 선물처럼 찾아온 행운에, 사랑에, 혹은 마법에!!!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상태가 평생 안 올 수도, 와도 찰나일 수도 있겠지만 뭐 어쩌랴. 가끔 꿈을 꾸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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