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 편집본

2016년 유럽여행기 1 – 독일 편

6월 12일부터 23일까지 유럽 여행을 다녀왔지만, 왠지 그동안 기록해두고 싶은 마음이 잘 안 들었다. 애초에 떠날 때부터 별 흥이 안 나긴 했다. 회사에서 보내준 여행이라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잘 생각해보니 그냥 2009년에 갔을 때보다 일곱 살이나 먹어 버려서 경이를 느끼는 능력이 좀 쪼그라든 게 아닌가 싶다. 다들 유럽 다녀오면 “다시 가고 싶다~” 하는데 왜 그런 마음이 하나도 안 드는지… 어디에 살아도 인생 별 거 없으니 인터넷 잘 터지는 편한 데서 맛있는 거나 먹으며 여포와 살고 싶다는 무기력한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정말 늙기 시작했나보다. 그리고 이 사실에도 별로 슬프지 않다. 엄청나게 지금 나에게 만족하거나 아니면 정말 무엇 하나 애착이 없는 상태거나 그런 듯하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반짝이는 순간들도 있었다. 유쾌한 일도, 불쾌한 일도 있었다. 까먹고 싶지 않은 감상도 있는데 그건 주로 그 감상이 소중하기 때문이 아니라 평이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어떤 장소들은 여행객에게 단 한 종류의 감상만 허락한다. 정해진 포토 스팟에서 찍은 고만고만한 사진을 들추며 갔다왔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되는 종류의 감상이다. 이번에도 2009년에 느낀 감상을 다시 느낀 적이 있는데 끔찍히도 지루했던 순간이었다.

6/12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점심 무렵에 도착했는데, 반팔만 챙겨온 게 무색하도록 추웠다.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에 한국에서 사온 오렌지 할리데이 유심칩을 끼웠다. 다행히도 여행 내내 쾌적하게 데이터 잘 썼다. 핸드폰의 구글맵이 없었다면 낯선 곳에서 헤매다 끝났을지도 모른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 중앙역까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한다. 늦은 시간에 움직일 것이 걱정돼 중앙역 근처에 숙소를 잡았는데 조금 후회했다. 숙소의 질은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역 근처라서 그런지 주변이 시끄럽고 지저분했기 때문이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2009년 잠시 이곳을 들린 기억이 났다. 그때는 프레첼을 사먹었었다. 벤츠가 많다는 거 외에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도시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원색의 격자 창문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유래한 디자인인지 모르겠다. 나중에 좀 찾아보자.

도착한 날부터 하릴없이 숙소에 들어앉아 있기도 그래서 짐을 부린 후에 그냥 표를 끊고 아무 버스나 올라타 프랑크푸르트 시내를 구경했다. 어딘지 모르겠는 종점에 내려 좀 걷다가 적당해보이는 음식점에 앉아 구운 가지요리와 까르보나라 파스타, 맥주를 주문했다. 생각보다 맛이 좋아서 기분이 꽤 좋아졌다.

서버 할아버지는 혼자 프랑크푸르트 외진 구역까지 온 동양인 여자 여행객이 신기한지 계속 말을 걸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도 나도 영어를 잘 하지 못해 우리 사이는 웨얼 얼 유 프롬과 땡큐 이상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알뜰하게 팁까지 챙겨주고 나서 일어났는데 도무지 숙소에 가는 길을 모르겠어서 조금 헤맸다.

헤매다가 우리나라 광화문 씨네큐브 앞에 있는 망치질 하는 사람이랑 비슷한 조각을 발견했다. 그러고보니 씨네큐브 안 간지도 오래됐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무사히 숙소에 돌아와 시차적응에 괴로워하지도 않고 푹 잘 잤다.

6/13

다음날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겨 쾰른으로 향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겨우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다소 냉막한 느낌의 프랑크푸르트와는 달리 쾰른은 플랫폼부터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반나절만 쾰른에서 머무를 예정이었기 때문에 짐은 역 안에 있는 짐 보관함에 보관했다. 보관함 설계가 아주 잘 되어 있는데, 마치 작은 주차타워처럼 바깥에 튀어나와 있는 입구에 짐을 넣으면 문이 닫히고 내부 컨테이너가 움직여 짐들이 지하에 보관되는 구조로, 매우 효율적으로 보였다. 이후 다른 유럽의 역들에 가본 경험을 되살려보면 독일은 정말 기차와 기차역이 참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쾰른역은 출구가 크게 두 개인데, 대부분의 관광객은 대성당 방향으로 나간다. 그 출구로 나가기도 전에 유리창을 통해 쾰른 대성당이 보이는데, 생각보다 아주 아주 압도적이었다.

쾰른 대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입은 폭격으로 겉이 그을려 까맣다. 까맣고 거대한 고딕 성당은 어떻게 보면 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기이하다기보다는 꽤나 뭉클함을 느꼈는데, 아마도 늙어 골골대는 기괴한 노인 같은 쾰른 대성당이 젊고 발랄한 쾰른 역사와 기막히게 어우러지는 모습이 아주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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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쾰른 대성당의 내부는 빛으로 가득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바깥의 구름 지나가는 그림자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해 성당 내부로 비쳐 들어올 정도로 채광이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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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 이 정도면 단순히 미사 정도를 하려고 지은 건물이 아니라 들어온 감상자들에게 빛의 경이를 체험하게 해주는 하나의 작품으로서 손색 없네.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어차피 다음 차 시간까지 시간도 많고 월요일이라 미술관 문도 열지 않는다. 바깥은 춥다. 그래서 한참을 쾰른 성당 내부에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빛이 정말 예쁘다. 이런 감탄만 오래 했다.

밖으로 나와서 또 발길 닿는 대로 걸었더니 강이 나왔다. 라인 강일까?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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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트였지만 안락한 느낌이 나는 좋은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모두 친절해 보였고 남자들은 유난히도 잘생겨 보였다.

쾰른 역으로 이어지는 철교에는 남산 타워처럼 사랑을 맹세하는 자물쇠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이런 문화가 전세계에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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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교를 건널까 말까 고민하다가 딱 봐도 사연이 있어보이는 여자가 울면서 철교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고 있는 걸 보았다. 슬픔이 흔해서 나도 슬펐다. 촌스러운 색색깔의 자물쇠 사이로 해가 너무나 눈부셨다. 선글라스를 짐에서 꺼내지 않은 걸 조금 후회할 정도였다.

다시 돌아온 쾰른역 내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막 시작한 유로 2016을 관람하고 있었다. 아주 조용하고 열성적으로 관람하는 아저씨들의 모습을 뒤로 하고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로 향하는 떼제베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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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다 뭐다 해서 벨기에로 넘어가는 게 빡빡할까봐 걱정을 좀 했는데 검표를 철저히 한 것 외에는 여권도 요구받지 않고 싱겁게 브뤼셀에 도착했다. 아니면 내가 별로 위협적으로 안 보였나?

브뤼셀 북역에 도착하니 어느덧 저녁이었지만 역시 아주 환했다. 서머타임까지 적용해서 저녁 열 시는 돼야 좀 어둑해지더라. 그래도 브뤼셀 시내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곳곳에 무장 군인들이 서 있었고 탱크 비스무리한 차도 도로에 주차돼 있었다. 비록 나중에 유로 2016을 응원하는 시민들이 그 탱크에 올라가 노는 걸 보긴 했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벨기에 편은 나중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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