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 편집본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2년 전 어느 날, 회사가 느닷없이 전 직원을 상대로 MBTI 검사, 즉 성격 유형 검사를 실시하겠다고 공지했다. 처음에는 MBTI 검사라니, 고등학교 때 청소년 문화센터에서 진로 상담을 위해 받은 게 마지막이니 거의 10년만이네, 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조금 귀찮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질문지에 답변을 체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받은 검사 결과지에는 그럭저럭 나와 맞는 듯한 해석이 쓰여 있었다. 나는 ENTP형이랬다. 내향적(I)이기보다는 외향적(E)이며, 감각적 인지(S)보다는 직관적 통찰(N)을 주로 쓰고, 감정(F)보다는 사고(T)를 하며, 판단(J)보다는 인식(P)이 앞선다는 ‘발명가형 인간’이었다. 순식간에 회사의 전 직원이 열여섯 개의 성격 유형으로 분류되었다. 친한 동료들끼리 누가 어떤 타입이고 하면서 킬킬댔다. 아마 그쯤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모든 직원들이 회의실로 모였다. 회의실에는 기업 문화 리더십, 어쩌고 하는 곳에서 비싼 돈 주고 부른 남자가 와 있었다. 남자는 직원들을 MBTI 결과에 따라 크게 여덟 그룹으로 나눠 앉게 했다. 사장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깔끔하게 모여 앉았다. 남자는 간단한 미션을 내주고 그룹별로 해결하게 했다. 미션 결과물이 어찌나 각 그룹의 MBTI 특성에 맞게 나왔는지 MBTI의 신통방통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미 MBTI 결과를 알고 있었고, 각자의 역할 배역에 충실하게 미션을 수행했던 것 같다. 남자는 당연한 결과를 보며 이 그룹은 뭐를 잘하고 뭐를 못하고,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이런 내용을 약 두 시간여에 걸쳐 이야기했다. 그때 뭔가 떨떠름했다. 서로를 알고 있다는 오만함이 직원들 사이에 감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역시 내향형이었군. 맞아, 함께하는 식사 자리를 유난히도 싫어하는 것 같았어.’ ‘감정 수치가 저렇게 낮게 나온 걸 보니 거의 사이코패스 수준이잖아?’ 이렇게.

그리고 동시에 사장의 존재가 의식되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아닌 척 사장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당연히도 사장은, 아니 회사는 효율성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그에 적합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겠지! 많은 직원들이 그냥 무난하게 답변할 걸 괜히 솔직히 답변했다고 후회하는 낯빛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이 검사의 무례함을 깨달았다. MBTI 검사는 공장 기계의 특징을 파악하는 테스트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 기계가 파악하기 까다로우므로 정성을 다해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것뿐이었다.

허먼 멜빌의 소설 에서는 변호사 ‘내’가 고용한 필경사인 터키, 니퍼즈, 진저 넛, 그리고 마지막에 합류한 바틀비가 등장한다. ‘나’는 더없이 오만한 시선으로 터키와 니퍼즈, 진저 넛을 파악한다. 변덕스러운 칠면조를 뜻하는 터키, 예민하고 불같은 집게 니퍼즈, 아예 즐겨 먹는 음식이 이름이 되어버린 진저 넛까지, 그들의 이름에서부터 그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나’는 바틀비에 대해서만은 그러지 못한다. 그가 왜 걸신들린 듯이 필사를 했는지, 왜 늘 칸막이 뒤쪽의 어슴푸레한 창가에 서서 막다른 벽돌벽을 오랜 시간 내다보았는지, ‘나’는 바틀비를 정말 단 하나도 파악하지 못한다.

무릇 이름 부르는 행위는 부르는 사람과 불리는 사람과의 관계맺음을 뜻한다. 그렇기에 손쉽게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많은 경우 폭력이 된다. 장애를 가진 사람을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으로만 이해하거나, 아이를 가진 여성을 ‘어머니’로만 이해하거나, 이는 모두 대등하지 못한 관계, 강제된 역할분담을 전제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회사 MBTI 검사에서 받았던 결과인 ‘발명가형 인간’이라는, 꽤나 멋들어진 칭호는 ‘터키’나 ‘니퍼’, ‘진저 넛’과 다르지 않았다. 노동자를 파악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이용하려는 자본가의 의도는 같았으니까.

실제로 의 ‘나’는 바틀비를 제외한 다른 필경사들을 비교적 순탄하게 제어한다. 그들의 습성을 파악해서 활용하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나’는 바틀비에 한해서는 언제나 이해에 실패하고, 때문에 그를 마음껏 써먹는 데에도 실패한다. 그래서 ‘나’와 철저히 주종관계인 다른 필경사와는 반대로, 바틀비는 아무리 고용인인 ‘내’가 무언가를 명령해도 자기가 “안 하고 싶은” 것들을 끝까지 관철할 수 있었다. ‘나’는 바틀비를 이해하지 못하자 두려워한다.

사실 ‘내’가 바틀비에게 느낀 것처럼, 타인이란 두려운 존재다. 나는 타인에게 기대를 품을 수도 있지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내 기대에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나를 해할 수도 있다. 내가 준 애정만큼 나에게 돌려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자신의 의지대로 나와 뜻을 같이했을 때, 서로를 신뢰하며 각자를 보일 때가 가치로운 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주인과 기계가 맺는 관계가 아닌, 인간과 인간만이 맺을 수 있는 그 관계의 마법같은 순간.

에서 ‘나’는 바틀비를 이해하지 못하자 얄팍하게 동정한다. 바틀비는 그조차도 거부하고 홀로 남겨져 죽는다. 마치 한 생물종의 멸종을 고하듯,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절박한 슬픔으로 가득하다.

“뒤늦게 용서를 꺼내지만 그것을 받을 사람은 절망하면서 죽었고, 희망을 꺼내지만 그것을 받을 사람은 희망을 품지 못하고 죽었으며, 희소식을 꺼내지만 그것을 받을 사람은 구제되지 못한 재난에 질식당해 죽어버린 것이다. 삶의 심부름에 나선 이 편지들이 죽음으로 질주한 것이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바틀비는 어쩌면 ‘내’가 마지막으로 마주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역시 를 읽고 쓴 숙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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