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 편집본

신은 위대하지 않다

모 출판사 사태를 한참 관망하다가 책장에서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어 냉큼 빼들었다. 바로 이 책인데, 대체 언제 읽었는지 혹은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는데 현실 사건이 자꾸 떠오르니 왜 이렇게 웃기고 재밌는지! 이 책을 읽고 빡치지 않을 수 있는 나의 무신론(?)에 감사한다. 아무튼 끝까지 읽을 지는 모르겠지만 킬킬대며 읽는 중.

다른 이야기지만 참 기술 많이 발전했다. 핸드폰으로 책을 찍으면 사진에서 텍스트가 자동으로 추출됨… 아주 편하게 인용을 가져왔다.

아래는 앞 부분애서 인상깊었던 구절.


 

과학과 이성은 충분조건이라기보다 필요조건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에 어긋나거나 이성을 능욕하는 모든 것을 불신한다. 우리의 의견이 많은 면에서 갈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모두 자유로운 탐색, 개방적인 정신, 순수한 사상적 연구를 높게 평가한다.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교조적으로 떠받들지 않는다. 스티븐 제이 굴드 교수와 리처드 도킨스 교수는 단속평형설과 후기다윈주의 진화론 중 공백으로 남아있는 부분에 대해 꽤나 깊고 넓은 의견 차이를 보이지만, 우리는 서로를 파문하는 방법이 아니라 증거와 합리적 추론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무신론자들이 영리한 사람을 자처하며 우쭐거려도 된다는 도킨스 교수와 대니얼 데넛Daniel Dennett의 비굴한 주장을 내가 몹시 싫어한다는 사실도 지속적인 논쟁의 주제 중 하나이다.)

우리는 경이와 미스터리의 유혹에 잘 흔들린다. 우리에게는 음악과 미술과 문학이 있으며, 진지한 도덕적 딜레마를 다룰 때에는 성스러운 책의 신화적이고 도덕적인 이야기보다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실러, 도스토예프스키, 조지 엘리엇의 작품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의 정신은 물론 영혼까지도(달리 은유로 사용할 말이 없기 때문에 이 말을 썼다) 지탱해주는 것은 성서가 아니라 문학이다. 우리는 천국도 지옥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아무리 통계 조사를 실시한다 해도, 천국의 유혹과 지옥의 협박을 믿지 않는 우리가 독실한 사람들에 비해 탐욕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더 많다는 주장을 입증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실 제대로 된 통계조사 방법을 누군가가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오히려 반대의 증거가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삶이란 오로지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으며, 아이들을 통해 우리의 삶의 미래로 이어지므로 우리가 그들을 위해 뒤로 물러나서 자리를 내 주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기꺼이 인정한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것이 짧고 힘들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일단 받아들이기만 하면 서로에게 더 못되게 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상냥해질 가능성이 그래도 조금은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를 믿지 않아도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도 있다. 종교 덕분에 행실이 남들보다 더 나아진 사람이 그리 많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종교를 핑계 삼아 유곽 주인이나 인종 청소를 자행한 인간조차 깜짝 놀랄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주장 또한 당연히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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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또는 7일마다 한번씩, 또는 경사스러운 날 한 자리에 모여 자신이 올바르게 살아왔다고 천명하거나 땅에 납작 엎드려 자신이 아무 쓸모없는 존재라고 비탄에 빠질 필요가 없다. 우리 무신론자들에게는 우리가 교리를 잘 지키고 있는지 감시하는 사제같은 존재가 필요 없다. 희생 제물과 의식은 혐오스럽다. 어떤 그림이나 물건(인간의 발명품 중 가장 쓸모가 많은 물건 중 하나인 책도 여기 포함된다)을 숭배하는 행위와 성자의 유골도 혐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보기에 이 지구상에 특별히 신성한 곳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순례 여행을 하거나 아니면 무슨 신성한 벽이나 동굴이나 신전이나 바위 때문에 민간인을 죽이는 끔찍한 일들을 자행하는 대신 우리는 각자 사정에 따라 도서관이나 화랑 안에서 한가롭거나 다급한 발걸음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도 하고 마음이 맞는 친구와 점심을 함께 먹는다. 그리고 이런 행동을 하며 진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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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사람들에게 지식을 주거나, 숭고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때로는 종교가 훌륭하지만 모호한 인본주의로 변하기도 했다. 나치의 공범이 되는 것을 거부한 죄로 나치에게 교수형을 당한 용감한 루터교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eoffer가 좋은 예이다. 이제는 고대의 예언자나 현자같은 사람이나 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신앙은 반복되는 과거의 메아리에 불과하다. 때로는 끔찍한 공허감을 쫓아버리려고 거의 비명처럼 증폭되기도 하는 메아리.

<신은 위대하지 않다> pp.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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