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 편집본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상, 비평, 학문, 지식이나 정보를 둘러싼 이런 분야에서는 두 가지의 전형적인 형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쪽을 ‘비평가’라고 부르고 다른 한쪽은 ‘전문가’라고 부릅시다. 현재 대부분의 사회과학과 심리학적 지식을, 그것도 위에서 강림한 것 같은 그런 지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비평가’들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 무엇에 대해서도 재치 있는 코멘트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초조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에 매달립니다. 결국은 둘 다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환상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이 말하는 것처럼 거기에는 ‘향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참한’ 향락인 ‘팔루스적’ 향락이 말이지요. 자신을 하나의 ‘우뚝 솟은 전체’의 모습으로 제시하려는 향락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려는 ‘비평가’와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려는, 미리 누군가에게 지정받은 칸을 하나하나 주의 깊고 빈틈없이 칠하려는 ‘전문가’는 모두 결국 자신을 ‘완벽한 전체성’을 가진 ‘우뚝 솟은 만능인’으로서 내세우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둘러싼 향락에 취해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전체주의적’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pp.25-26)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이것은 착취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읽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은 읽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읽어버리면 미쳐버리고 맙니다. 이건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이렇습니다. 당신의 꿈을 그대로 보면 저는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문득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리운 고향의 풍경이나 할머니 꿈을 꾸었다고 합시다. 멀리 저편에 흐릿하게 흔들리는 추억과도 같은 그 꿈을. 그러나 제가 그것을 그대로 직접 또렷이 보았다면.

또는 제 꿈을 당신이 보았다면.  여러 가지로 이야기해왔습니다만 쓴다는 것,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거지반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가 작동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 알아버리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의 것이 아니면 일류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고, 따라서 기묘한 무료함이나 난해함을, ‘기분 나쁜 느낌’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 그러므로 다들 읽는 것이 무서운 겁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겁니다. 필터를 끼워 정보로 환원된 것만 상대하면 무서울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정보라면 한 번 읽으면 됩니다. 또는 저장해두고 검색기만 돌리면 됩니다. (p.42-43)



떠올려봅시다. 우리는 무엇을 논하고 있었던 걸까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읽고 쓰고 번역한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였습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무슨 일일까요? 그는 알았언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성서에는 교황이 높은 사람이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p.83)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 대혁명에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혁명의 과정에서 폭력에 의해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선행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번역하고, 천명하는 것,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것이 나타나는 일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혁명에서는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닙니다. 경제적 이익도 아니고 권력의 탈취도 아닙니다. 텍스트의 변혁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 혁명이 문학적 몽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혁명은 ‘문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릅니다. 결코 다릅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나고, 문학을 잃어버린 순간 혁명은 죽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문학을 폄하하고 문학부를 대학에서 추방하려고 할까요? 왜 문학자 스스로가 문학을 이렇게까지 업신여길까요? 그것은 바로 문학이 혁명의 잠재력을 아직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pp.113-114)



그리스인들이 쓴 책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정도일까요? 천 권 중 한 권입니다. 많이 잡아도 두 권을 넘지 않습니다. 즉 99.9퍼센트는 사라졌습니다. 사멸한 것입니다. 남은 것은 단 0.1퍼센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것조차 거의 흩어져버렸습니다. 지금의 전집은 그가 쓴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 다만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자가 탄생한 지 아직 5000년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5000년 동안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완전한 문맹이었습니다. (pp.259-260)



1476년에 출판된 독일, 라틴어 대역의 “울름판 이솝이야기”는 무려 125매나 되는 목판화가 들어 있습니다. 삽화의 범주를 살짝 넘은 것이지요. 게다가 판을 거듭함에 따라 삽화는 점점 늘어납니다. 지금의 만화 같은 것이지요. 삽화 같은 비주얼적인 것과 결합함으로써 현재 봉착해 있는 출판 불황의 활로를 개척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것 역시 반복되어온 일입니다.

(..) 400만명밖에 자신의 사인을 할 수 없었다는 무리한 상황에서 “죄와 벌”같은 작품들을 차례로 쓴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단적으로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읽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어로 문학 같은 걸 해봤자 소용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파멸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요?

(..) 도스토옙스키 등은 10퍼센트 이하에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소설을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혀 자명한 게 아닙니다.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리스인들이 99.9퍼센트 소멸한 가운데 0.1퍼센트에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처럼 러시아인들도 이겼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0.1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0.1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즉 우리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pp.267-276)



(..) 고생물학자의 통계에 따르면 생물 종의 평균수명은 대체로 400만 년입니다. 물론 평균입니다. (..) 하지만 가령 우리들 호모사피엔스가 400만 년 산다고 하면, 우리가 탄생한 지 20만 년이 되었으니 앞으로 380만 년 정도는 남아 있습니다. 400만 년에 20만 년이니까 20분의 1이네요. 여든 살 노인이라고 보면 네 살에 불과합니다. 네 살치고는 상당히 잘하고 있습니다. (..) 물론 통계는 통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380만 년을 산다는 건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백 보 양보하여, 그렇네요. 379만 년 양보한다고 해도 앞으로 1만 년은 남은 셈이네요. 농경문화가 시작되고 나서 지금에 이르는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문자를 산출하고 나서 지금까지의, 두 배 가까운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1만 년간 우리의 루터, 무함마드, 하디자, 아우구스투스, 테레지아, 도스토옙스키, 조이스, 베케트, 버지니아 울프, 그(녀)들 같은 사람들이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을가요? 어차피 1만년이나 있으니까 예수도 부처도 다시 올지도 모릅니다.

(..) 어쩌면 380만 년의 영원 속에서 자신의 삶은 아주 작은 좁쌀 같은 것이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말하겠습니다. 아니, 그것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면 400만 년이라는 인류의 삶조차 우주의 방대한 생성 안에서는 무의미해져버립니다. (..) 그것은 자신이 뭔가의 원인이고 행위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사고의 오류에서 오는 거짓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 니체는 이런 의미의 말을 했습니다.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극소의, 그러나 절대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거는 것. 그것이 우리 문헌학자의 긍지고 싸움이다, 라고요. 이것이 미래의 문헌학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글쎄요. 읽을 수 있을 리도 없는 것을 ‘읽으라’고 하는 것, 읽을 수 없다는 무한한 소격을 그대로, 그래도 ‘읽는다’는 것을 행사하는 한순간의 기회를 부여하려는 것. (pp.278-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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