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명이라는 사람이 한꺼번에 죽는다는 건 도대체 뭔지 알 수가 없다. 바로 내 눈 앞에서 한 명씩 차에 치어 200명이 죽는다면, 정말로 오래 걸릴 것이다. 다니는 회사가 송두리째 무너져서 모든 사람이 몰살당한대도 고작 40명이나 될까말까다. 길 가다 개미집을 부숴서 그 개미들을 모두 짓밟아 죽인다 해도 그게 200마리나 될 지 모르겠다.
이 의도적으로 무뎌진 감수성은 이 세계를 견디도록 진화된 것이다. AI 전염이 될까봐 멀쩡히 살아 있는 닭 몇 백 마리를 구덩이에 파묻는 뉴스 영상을 몸서리치며 무감각하게 넘기고도 치킨을 먹을 수 있는데, 200명의 수몰자가 있다고 해서 삶이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나는 당장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지 알고 있으며, 크고 작은 국지전에서 그곳을 지나간단 이유만으로 총알에 꿰뚫리는 사람들, 200명을 태우고 통째로 추락해버린 비행기, 기름 유출된 바다에서 떼죽음당한 물고기들, 햇빛 한 번 보지 못하고 고기가 되기 위해 죽는 몇백 톤의 가축이 있음을 알고 있다. 결국에는 방사능 피폭도, 배 사고도 누군가에게 일어날 일인데, 나는 핵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쓰고, 대량 사육된 동물의 살코기를 뜯으며, 가끔 배를 타면서 그 모든 ‘사고’가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음에 안도한다. 다만 운 좋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어떻게 이 몰살을 견디고 살아갈 수 있나. 그래도 되는 건가. 다만 운 좋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 몰살들이 없는 척 그 몰살들 위에서 희희낙락 행복 추구권을 외쳐도 되는 것인가. 죽음은 평등하지 않다. 사람 명은 하늘에 달렸다고 하지만 불행은 확률적으로 약한 자들에게 온다. 인천에서부터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가야 하는 사람들, 집값이 싼 핵발전소 옆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 가건물에 투숙해야 했던 사람들, 달걀을 낳지 못하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칼날에 갈려 버리는 수평아리들.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로 시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 몰살들이 왜 일어나는지, 어떤 사회적 구조로 일어나는지는 그래,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겠지. 그래야만 하고. 그런데 그 죽음의 사이즈가 정말 이해가 되나요? 이 일상적인 홀로코스트들을 뻔뻔하게 견뎌내고 있었던 나와 같은 동시대 사람들이 별안간 수몰자들의 죽음에 대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 생경하면서도 불쑥불쑥 가증스럽단 마음이 든다. 특히나 사망자 수를 세어가며 엔터테인먼트처럼 소비하는 슬픈 마음들이 진짜 싫다. 차라리 섹드립이 천만배 백만배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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