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 편집본

맥락 없이 강렬한 어린 시절의 기억

어린 시절의 기억 중 불가사의하게 머리 한켠에 각인된 장면들이 있다. 의미 부여 같은 과정을 따로 안 거쳐도 공들인 회화처럼 종종 생각이 난다. 어쩌면 이 장면들로 내 인생의 온도를 가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 중학교 초반 시절. 나는 시내버스 창가 자리에 앉아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버스는 정류장에 정차했다 느릿한 속도로 막 출발하는 중이었다. 어떤 계기도 없었다. 갑자기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 그냥 길을 가는 사람들 모두가 시야에 한꺼번에 들어왔고, 그들 모두가 각자 살아온 시간만큼의 현실적인 세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아득하고 감격스럽게 느껴졌다. 저 비슷한 옷을 입고 오가는 사람들 모두가 울고 웃고 싸워온 장대한 역사를 갖고 있을 터였다. 나는 한없이 평범해졌고 풍경 같은 사람들이 모두 중요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오랫동안 두근대며 놀라고 있었다.

2. 초등학교 때라고 생각한다. 대학 병원 내 셔틀버스를 타고 좌석에 앉으려는 참이었다. 승객이 꽤 있어서 엄마는 뒤쪽 좌석까지 날 데리고 가야 했다. 앉으면서 나는 앞 좌석 주머니에 꽂혀 있었던 성병 관련 리플렛에서 콘돔이라는 글자를 보았다. 당시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걸 말하면 엄마를 당황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알았다. 나는 좌석에 앉으며 ‘엄마, 콘돔이 뭐야?’라고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물었다. 엄마는 부끄러워하며 웃었고 ‘나중에 말해줄게.’라며 나의 입을 거의 막다시피 했다. 그 때 내가 본 엄마의 표정은 정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그런 표정이었다.

3.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천천히 시력을 잃어 가는 실존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가, 읽었던가. 실낱같은 희미한 빛이 가물가물하다 이윽고 불이 꺼지듯 완전하게 시력을 잃는 그 순간을 상상했다. 한동안 너무 슬퍼서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났다.

4. 영동에 살 때니 아마 6~7세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친구와 함께 시소를 타고 있었다. 친구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할머니에게 좀 못되게 굴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착한 어린이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기도 했고, 친구에게 쩔쩔매는 할머니를 동정하는 마음도 있어, “**야, 착하게 살아.”라고 말했다.

5. 초등학교 6학년 때 성교육을 받았다. 정작 그 성교육은 생각이 안 나는데 이상한 장면이 기억난다. 성교육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노인정이 하나 있었다. 약간 어스름이 지는 가운데 노인정 앞 평상에 할머니 한 분과 할아버지 한 분이 서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나는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생식을 위해 성행위를 했을 거라는 사실이 너무나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 어렸을 때 자주 꾼 꿈

1) 감옥에 갇히는 꿈. 엄마가 면회를 와서 창살 너머에서 펑펑 울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왠지 감옥이 서커스단의 동물이 타는 이동형 우리 같아서 감옥에 실려 가며 엄마랑 생이별하기도 함. 이 꿈을 참 자주 꿨는데. 감옥에 가는 게 어린 나에겐 가장 무서운 일이었던 것 같다.

2) 2층 대저택을 거쳐 어디론가 가는 꿈. 가는 곳은 언제나 달랐는데(카레가 끓는 용암이라던가, 까마득한 낭떠러지라던가) 그 2층 대저택은 언제나 똑같았다. RPG 게임에서의 세이브 포인트 같은 느낌? -> 이 대저택 꿈과 종종 콤보로 나오는 게 택시 꿈. 대저택을 거쳐 이상한  장소에서 스릴 넘치는 모험을 마치면 안심한 마음으로 택시를 타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게 되는데, 택시비를 안 내도 문제가 없는 것 때문에 이거 꿈이구나 하고 알아챈 적이 왕왕 있음. 곧 까먹지만…

3) 비교적 중학교 시절에 자주 꾼 꿈인데 외출해서 왠지 허전한 느낌에 아래를 보니 아랫도리를 안 입고 나왔다는 설정. 코트로 가려져 있을 때도 있고 속옷도 안 입고 있을 때도 있다. 이 꿈을 꾸면 정말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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