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 편집본

무엇이 아름다운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점점 머리가 빠릿하게 안 돌아간다. 아니, 빠릿하게 돌아가게 하고자 하는 향상심 같은 게 없어졌다고 보는 게 맞겠다. 늙어지는 걸까? 멍하니 손 놓고 있는 사이에 점점 뇌 순발력이 줄어드는 것 같아 생각만 하면 마음이 울적하다. 더구나 요새는 뭐랄까, 아름다운 것을 학습하고자 하는 에너지도 잘 안 생긴다.

아름다운 것을 학습하다니. 생각해 보면 웃기는 언어 선택이다.

세상에는 훌륭한 영화도 소설도 음악도 그림도 많고 그에 쉽게 접근 가능하며, 계몽의 시대가 꽤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된 덕에, 감각마저 훈련할 수 있는 훌륭한 레퍼런스들이 잘 마련돼 있다. 잘 생각하면 이보다 더 좋은 시대는 없을지도 모른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난 나 같은 천것이 이런 고급 유희에 동참할 수 있다는 건 귀족들이 보기엔 꽤나 배알이 상하는 일일 것 같다.

많은 이들이 말해왔듯, 이러한 민주화가 ‘fine’이라는 아우라의 상실을 가져왔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뒤늦게 fine art를 갈구하는 것은 천것으로 태어난 자의 이룰 수 없는 계급 상승 욕망일지도 모르겠다. 로마 제국의 폐허에 감정이입하는 꼴이랄까. 기를 쓰고 대학을 보내려고 하는 내 세대 어머니들의 마음 같은 것. (사실 지금은 대학 졸업장이 사회적 특권이 되는 시대는 지났음에도 그녀들의 마음은 과거의 열등감을 호출한다.)

지나치게 패배감 어린 비아냥일까? 그러나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내게 어떤 충격도 주지 않는다면, 맞는 비유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목격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면, 역시 맞는 비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래서 사실, 아름다움은 조금 힘든 종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은 놀라운 것이고, 생경한 것이고, 허를 찌르는 것,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언어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대체 불가능하고, 스스로를 통틀어 맥락화하는 것이다.

예쁜 것과 아름다운 것은 구별해야 한다고 본다. fancy는 beautiful이 아니다. 예쁜 것은 그 자체로 기존에 주입된 예쁨의 쾌락 중추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더 예쁜 것, 덜 예쁜 것이 가능하다. 아름다운 것은 각자의 세계 안에서 그 가치를 증명한다. 그래서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서로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그 세계에 투항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어서, 논쟁 가능한 지점을 발견하는 것 자체도 힘들거니와, 취향 차라고 넘어가기도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하간에 나는 요즘 참 학습에 게으른 것 같다. 편집 일을 하다 보니 계속 완결성을 추구하게 되고, 어설프게 마감된 것들을 점점 경원시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완결성이란 상대적으로 간단한 것이다. 누가 봐도 보이는 것이니까. 그러나 아름다움을 영접하는 일은 노력도 필요하고 우연도 개입해야 하는, 좀 더 복잡한 문제다.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거야’라는 책 제목도 있지만, (사실 책은 안 읽어봤고…) 실제로 그럴 수 있지 않을까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름다움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무시무시한 힘이다. 나는 종종 선하디 선한 아름다움들을 퍼뜨리고 싶어지지만, ‘나의 취향에 굴복해!’라는 말과 거의 동어처럼 느껴져 늘 곤란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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