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 대한 의문과 증오에 사로잡혀 불면에 시달린 적이 있다.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배신의 경위를 추측했고 그에 상응하는 복수의 설계도를 그렸다. 밤이 깊어갈수록 설계도는 범죄에 가까운 수위로 치밀하게 완성되어갔다. 다행스러운 것은 낮이 수많은 밤들을 단절해준다는 사실이었다. 해가 뜨고 나면 네 과오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내 증오가 무서워졌고, 정확한 자초지종도 알지 못하면서 끔찍한 복수를 꿈꾸는 성마른 내 성품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밤이 돌아오면 처음으로 돌아가 설계도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반복 속에서 고통은 점점 심해졌다. 나는 문득 고통의 원인이 너의 배신이 아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난 슬그머니 너를 두둔하기 시작했다. (중략)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너와 마주쳤다.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지만 네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기에 굳이 알은체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그때는 나도 몰랐는데 이제는 알 수 있다. 혹여 네가 용서를 구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 그건 두려움이었다. 네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한다면 용서하기 싫어도 용서해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어쩌면 기다렸다는 듯 쉽게 용서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은 오래전 내가 어렵게 성취한 것이 용서도 뭣도 아닌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한 회피였을 뿐이고 사실 결코 너를 용서할 수 없었음을 깨닫게 했다. 너를 마주한 순간 증오와 불면은 순식간에 되살아났고 나는 고통스러웠던 과거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하고 내내 머물러 있던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맹세컨대 너를 찾아간 것은 복수가 아니라 용서를 하고 싶어서였다. 두려움을 버리고 널 용서해야 과거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리석게도 세 번이나 냉대를 당한 뒤에야 네가 용서를 구할 사람도 아니고 하다못해 진실을 이야기해줄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중략)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뿐이다. 너를 찾아가 너의 죄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 네가 진심으로 나를 환대하고 사죄하는 날까지, 그리고 변명이 아닌 너의 말로 이 소설을 고쳐 쓰는 날까지 나의 방문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 날이 올까? 네가 나를 알아보기나 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까지 말한 네가 너인지 알고나 있을까?
– ‘너를 닮은 사람’ 작가노트 중에서
정소현의 단편소설 ‘너를 닮은 사람’의 작가노트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문을 구글링으로 쉽게 구했다. 소설도 강렬했지만 작가노트는 다큐멘터리적이라 실은 소설보다 더 파워풀한 맛이 있었다.
…무튼 이토록 강력하게까진 아니지만 나도 이 마음들에 적절히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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